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을 때까지

주는 일의 진정한 목표는, 받는 사람이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먹이는 것은 머지 않아 그들 스스로 먹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머지않아 그들이 우리의 가르침 없이도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선물의 사랑에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 사랑은 포기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자신이 불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그들에겐 내가 더 이상 필요 없어”라고 말하게 되는 시간을 보답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모성 본능 자체로는 이러한 사랑의 법을 이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 본능은 그 대상의 유익을 바라지만, 여기에는 그 유익이 오직 자기가 주는 유익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이 모성 본능이 스스로 포기할 수 있으려면, 더 차원 높은 사랑이 간섭해서 도와주거나 그 본능을 길들여야만 합니다.

애정은 상식과 공정한 주고받기와 ‘선량한’ 태도가 있을 때 비로소 행복을 낳는다는 사실입니다. 즉, 애정에는 애정 이상의 무언가가 더 필요합니다. 단순히 감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상식’, 즉 이성이 필요합니다. 또 ‘서로 공정하게 주고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애정이 시들해질 때는 다시 자극해 주고, 애정이 사랑의 기술을 망각하거나 무시하려 할 때는 제어해 줄 정의justice가 필요합니다. 또 ‘선량한’ 태도도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인내나 자기부인이나 겸손과 같은 선이 있어야 하며, 우리의 애정은 애정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사랑으로부터 지속적인 간섭을 받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애정으로만 살려고 하면, 우리의 애정은 그만 ‘썩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한다” 는 오비디우스의 말은 에로스에 해당되지만, 다른 종류의 사랑도 똑같은 여지를 안고 있습니다. 즉, 그 사랑 안에 증오의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만일 애정이 삶의 절대 주권자가 되면, 그 씨앗은 발아하기 시작합니다. 신이 되어 버린 사랑은 악마가 됩니다.

C.S.Lewis - The Four Loves 중 '애정', 모성애에 대한 부분 중 발췌

간혹 애정을 주어야 하는 위치가 되거나 그러한 역할을 맡게 되었을 때, 주는 것보다 포기하는 것이 더 어려울 때가 있다. 내가 베푸는 애정이 더 이상 '불필요한' 것이 되었을 때의 상실감 같은 게 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모성애 뿐 아니라 다른 종류의 사랑에서도 비슷하다.

애정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사랑으로부터의 지속적인 간섭.

애정이 우리를 죽이지 않게 하소서.

Dev (0.053)